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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절규》 너머의 뭉크를 만나다 — 오슬로 MUNCH 관람기

오슬로 뭉크 미술관에서, 우리가 몰랐던 뭉크를 만나다

10월 5일 오후, 화가인 아내 김영미 작가와 함께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MUNCH)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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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 와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 가운데 하나였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세계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미술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도 그의 대표작 《절규(The Scream)》만큼은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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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그동안 여러 나라의 미술관에서 뭉크의 작품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번처럼 한 작가의 작품을 이렇게 많은 수량으로, 오랜 시간 동안 집중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미술관에 들어선 뒤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한 작품 앞에 서서 보고, 다시 뒤로 물러나 바라보고, 때로는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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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던 뭉크는 아주 작은 일부였다

뭉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절규》다.

불안에 휩싸인 듯한 인물, 요동치는 하늘과 풍경, 강렬한 색채.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도 뭉크는 오랫동안 ‘불안과 고독을 그린 화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를 보면서 그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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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세계는 《절규》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넓었다.

사랑과 이별, 질투와 욕망, 삶과 죽음은 물론이고 가족, 초상, 자연과 풍경까지 그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내가 사진이나 화집에서도 본 기억이 없는 작품들이 계속 나타났다는 점이다.

한두 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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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하나를 지나면 또 다른 뭉크가 나타나고, 다음 전시장으로 가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뭉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뭉크는 그의 거대한 예술 세계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작품 앞에서 만난 《절규》

물론 이날 가장 기대했던 작품 가운데 하나는 《절규》였다.

너무나 많이 보아온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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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도 보았고, 인터넷에서도 보았고, 포스터와 각종 이미지에서도 수없이 접했다.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익숙하다는 생각까지 드는 작품이다.

그러나 원작 앞에 직접 서면 느낌이 달라진다.

화면의 크기와 색, 붓의 움직임, 그리고 작품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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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인물만 불안한 것이 아니다.

하늘도 흔들리고, 땅도 흔들리고, 주변의 풍경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파동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한 인간의 표정을 넘어 세상 전체로 번져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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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품을 실제로 보는 재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작품을 다시 발견하는 것.”

《절규》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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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와 함께 미술관을 본다는 것

이번 관람이 내게 조금 더 특별했던 것은 아내가 화가이기 때문이다.

김영미 작가는 오랫동안 파란색을 중심으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해왔다. 현재는 ‘Beyond The Time’을 주제로 시간과 기억, 존재의 문제를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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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진을 찍지만 아내는 그림을 그린다.

같은 작품을 보면서도 우리는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나는 작품 전체에서 먼저 느낌과 이야기를 읽으려고 하는 편이다. 반면 아내는 색의 배치와 붓질, 화면의 구성, 물감의 질감 같은 것들을 더 오래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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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냥 지나칠 뻔한 작품 앞에서 아내가 발걸음을 멈추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 색 좀 봐.”

“이 부분은 정말 대단하네.”

그 말을 듣고 다시 작품 앞으로 돌아가 보면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혼자 미술관을 보는 것과 화가와 함께 보는 것은 이렇게 다르다.

아마 이날 내가 만난 뭉크 가운데 일부는 아내의 눈을 빌려서 본 뭉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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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에게는 불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전시장을 걷다 보니 한 가지 생각이 더욱 분명해졌다.

뭉크에게는 불안과 죽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 있었고, 자연이 있었으며, 사람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에 대한 집요한 관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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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감정들을 피하지 않았다. 사랑도, 질투도, 공포도, 외로움도, 죽음도 그림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의 그림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감정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절규》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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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결국 자신의 시간을 남기는 사람

미술관을 나서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는 결국 자신의 시간을 남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뭉크는 자신의 시대와 삶, 사랑과 상처, 불안과 죽음을 캔버스에 남겼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작품 앞에 서서 그의 시간을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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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김영미 작가는 ‘Beyond The Time’을 그리고 있고, 나는 사진으로 ‘Deep Time-억겁(億劫)’이라는 주제를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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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하는 방식도 다르고 작품 세계도 전혀 다르지만, 결국 우리 두 사람이 오래 붙잡고 있는 것 역시 ‘시간’이다.

그래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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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뭉크의 작품들을 보면서 단순히 한 유명 화가의 작품을 감상했다는 느낌보다는, 한 인간이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예술로 남겼는지를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오슬로 뭉크 미술관에서 보낸 3시간.

수많은 작품을 보았지만 오히려 미술관을 나오면서 머릿속에는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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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떤 시간을 기록하고 있는가.

그리고 아내는 어떤 시간을 캔버스에 남기고 있는가.

여행 중 만난 미술관 하나가 우리 두 사람의 작업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오후였다.

<현담 이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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